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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문:눅10:30-37

제 목: 또 다른 사마리아인으로 살라.

 

한해의 끝이 다가오는 시점에 세상은 요란하며 어지럽고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이 불가한 불안정한 세상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도 우리그리스도인의 모습은 흔들림이 없어야합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속에서 돌아보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은 하나님의 사랑을 먼저 받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우리의 정체성이자 사명의 방향성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묵상하며 우리의 삶의 자취를 점검하는 우리 영주교회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1.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율법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두 가지의 질문을 합니다.

첫째는,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라는 질문과 둘째는, 예수님의 칭찬을 받은 후에 자신을 옳게 보이고 싶어서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예수님께 다시 질문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율법사는 진정한 이웃이 누구이며 그 삶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답을 알지 못한체 예수님께 질문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께 질문한 목적은 진정한 이웃에 관한 사랑과 헌신이 아닌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예수님을 발견하지 못해 질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강도 만난 자를 비유로 들어 말씀하신 이후에 “누가 네 이웃이 되겠느냐”고 율법사에게 물으실 때에 그는 선한사마리아인이 아닌 “자비를 베푼 자”라고 둘러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러한 질문에 정확한 답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 답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자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사명을 감당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일 것입니다.

 

2. 강도 만난 자.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모든 것을 빼앗기고 거반 죽게 되었다고 율법사에게 이야기합니다. 이 사람이 여리고에서 강도를 만난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모습은 영적교훈으로 생각해본다면 진리를 버리고 세상으로 내려가는 모습이요. 믿음으로 살던 세계에서 불신의 세상을 바라보고 내려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강도를 만난 나라나 민족 그리고 인생들의 자취는 바로 이러한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의 자취를 닮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지난 인생가운데서도 혹여 이러한 모습들은 없었습니까? 혹여 있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위험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실지로 믿음을 기반으로 사는 나라와 그 민족은 문명과 경제가 선진화되고 문화나 가치관에 공감할 수 있는 선한 질서가 그 사회에 내제되어있습니다. 하지만 과거의 믿음을 버리고 세상의 인본주의와 과학 그리고 새로운 인본주의의 가치관을 추구하는 나라는 도덕과 질서 그리고 하나님의 윤리가 결여된 불신앙으로 많은 새로운 위기를 창조해 낸다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서도 깨달음과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나도 언젠가 그 길에 들어 설 수 있음을 예비하는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강도 만난 자를 분별하고 안다면 그는 오히려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깨우치기 위해 그들을 싸매고 치료하는 인생으로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길을 갈 것입니다.

오늘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며 사명감당하는 자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시험하려는 율법사에게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사람의 진실한 삶의 자세라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강도만난 자를 비유로 그를 만나는 3명의 사람과 그중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통해 깨우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3. 강도 만난 자를 만난 세 명의 사람.

 

본문의 비유에 보면 세 명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 중 먼저 두 사람은 같은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하나는 백성을 속죄하는 지도자로서 제사장이요 하나는 성전을 유지하고 섬기는 자로서 구별된 레위지파사람이었던 것입니다. 즉 그들의 책임은 백성을 살피고 그들을 돕되 때로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회복하도록 돕는 역할이 그들의 정체성이자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의 비유 속에서 보여준 모습은 많은 생각을 하게합니다.

즉 제사장과 레위인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 맡은 자들로서 백성들에게 모범을 보이는 것이 그들의 의무며 사명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강도만나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하되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체 피하여 자기 갈 길만을 걸어갔던 것입니다. 그곳에 보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걸까요? 누가 보고 있었다면 그들이 과연 이런 모습을 보였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세 번째로 지나가는 한사람 그는 이스라엘이 상종치 않고 멸시하는 이방인으로서 사마리아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강도 만난 자를 보자마자 자기의 나귀에 태워 주막으로 데려가 도와주되 자신의 것을 주막주인에게 다 주고도 나중까지도 돕겠다고 약속합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어떤 생각이 드나요?

오늘날 당시 제사장과 레위인의 위치에 있는 위치로서 때로 목사님, 장로님, 권사님이란 직분을 맡았음에도 정작 강도 만난 자를 보면 외면하되 우리가 불택 자라고 손짓하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는 것을 본다면 우리는 그럴 수도 있지가 아니라 회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깨우치되 경고하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사람의 삶의 모든 일들을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메시지가 포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4.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과 행동.

 

오늘 예수님은 율법사와 온 이스라엘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의 선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사마리아인의 모습이 참으로 너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율법사에게 교훈 하십니다. 그 모습은,

 

①강도 만난 자를 보고 외면하지 않는 모습입니다.

즉 강도 만난 자를 보고 불쌍히 여기는 참된 마음이 속에서부터 솟아나 그에게 다가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모습은 때로 같은 동족이 아닌 나와 환경이 다르고 민족이 다른 사람들도 포함합니다. 그들이 강도 만나 매 맞고 죽어가는 모습을 모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형편을 살펴 긍휼의 마음으로 실지로 다가가는 모습 이것이 사마리아인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이며 율법사는 이것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부족한 이것을 깨우치기 위해 선한 사마리아인의 선행을 소개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마리아인의 외면치 않는 모습을 닮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며 사명을 감당하는 삶의 자세입니다.

 

②자신의 것을 희생하여 헌신하는 섬김의 모습입니다(10:33-34)

자신의 것이 여행 중에 얼마나 필요하고 중합니까?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도와주는 일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다 내어 놓습니다. 그래서 그가 가진 기름과 포도주, 자신의 의복, 자기가 타고 온 짐승 그리고 데나리온 둘을 강도 만난 자를 위해 내어 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강도만난 자를 도와주는 데에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내어놓고 희생하여 헌신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고 말씀하시되 사도요한은 요일3:17-18절에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라고 편지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우리의 정체성은 강도 만난 자를 돌보는 헌신과 섬김이 우리의 옷과 같은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단지 신분적으로나 위치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이것이 사마리아인의 정체성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합시다.

 

③강도 만난 자를 끝까지 책임지고 돌보는 섬김의 모습입니다(35)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자를 끝까지 돌 볼 의무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하여 그를 돌볼 것을 주막 주인에게 “부비가 더 들면 돌아 올 때에 값아 주겠다.” 라고 약속합니다. 이 얼마나 귀한 고백이며 우리그리스도인들이 부끄러워하며 돌아보아야 될 우리의 정체성일까요?

오늘 이 모습이 율법을 가르치는 유대지도자인 율법사의 본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예수님은 그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위치는 바로 이러한 위치가 어지러운 세상에도 우리가 변함없이 보여주어야 될 우리의 정체성이며 사명감당하는 자세입니다. 언젠가 예수님은 분명 우리에게도 36절의 말씀을 물으실 것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때 여러분은 무어라 답변하실 것입니까? 오늘 율법사처럼 사마리아인을 인정하기 싫어 둘러대는 자비를 베푼 자라고 말할 것입니까? 아니면 당연히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할 것입니까? 분명 우리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마음을 가지고 삶을 살아가며 대답할 준비를 가진다면 저와 여러분은 또 다른 사마리아인으로서 우리의 정체성과 사명을 이어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깨달은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 모두에게 주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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