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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눅10:38-42  제 목: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놀라우신 하나님의 역사는 어디에서 출발하며 어떻게 나타날까요? 진정한 자유는 예수님이 구세주이시며 우리의 속죄를 위해 오신 하나님의 어린양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깨닫는데서 시작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2022년전 세상에 오셨을 때 그것을 진정으로 깨달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세례요한과 시므온 안나 그리고 고침 받은 무리들 가운데 일부) 특히 예수님의 공생에 사역의 마지막이 다가 왔을 때 더욱 그것을 아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 등장하는 나사로의 누이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전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순전한 나드 향유를 부었습니다. 그녀가 예수님의 속죄사역을 깨닫고 향유를 부은 이 사건은 그녀가 진정 자유의 세계에 들어갔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녀가 어디에서 이러한 자유를 찾게 되었을까요? 이 시간 우리도 그 비밀을 찾아 자유의 발걸음을 걸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 들어가신 예수님.

 

예수님이 길을 가시다 베다니에 있는 마르다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마르다는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예수님을 대접할 마음에 마음이 분주해졌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께 나아가 말씀 듣는 일에 열중입니다. 이에 마르다는 말씀 전하시는 예수님께 나아가 마리아를 책망해 달라고 요청하면서 예수님 대접하는 일에 마리아가 도와 줄 것을 청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르다를 향하여 “혹 한가지만이라도 족하다 하시며 마리아의 선택이 옳다고 말씀하십니다.

 

자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마르다를 찾아 오셨을 때 예수님을 영접한 두 자매의 태도는 사실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들 각자 주를 위해 선택한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자매의 선택이 전부 예수님이 기뻐하는 선택이었을까요?

 

2. 두 자매의 선택.(요11;18-40)

 

두 자매의 성품과 그들의 선택이 무엇인지 살펴 볼 수 있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과 요11장18-40절에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보여준 두 자매의 모습 속에 드러나 있습니다. 두 자매의 성품을 평가한다면 마르다는 직접적이고 활동적이며 적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이나 마리아는 조용하고 차분하며 때로 많은 생각을 숨기고 있는 내성적인 성품의 소유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두 자매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르는 귀한 자매라는 사실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자매의 성품과 그들의 선택은 전혀 다른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마르다의 모습을 보십시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참으로 귀한 분으로 압니다. 그녀가

 

요11:27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라는 고백을 통해 그녀는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러한 귀한 분을 대접하는 일에 음식으로 대접하여 섬기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의 믿음이 진실하고 견고한 믿음이었는가? 살펴보면 그것은 염려가 됩니다. 그 이유는

 

요11:39-40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라는 마르다의 고백 속에 그녀의 믿음에 무언가 허점이 보입니다. 그렇습니다. 마르다의 믿음은 사람의 기준과 판단이 주도적인 신앙으로서 그녀는 일반적인 진리(사람은 죽으면 끝이다. 라는 지배적인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않은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믿는다 말 하면서도 실제론 사람의 생각과 지식, 그 시대의 문화적인 사고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며 믿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신앙이 여기에 머무르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죽거나, 사업의 실패 또는 감당치 못할 질병으로 낙심이 될 때 일어서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르다 처럼 예수님 앞에

 

요11:22-24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라고 고백하면서도 오락가락하는 신앙자세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사실 예수님이 지금 나사로를 살리시고자 오셨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끝자락은 결국 진정한 자유를 발견치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무엇을 첫째로 원하시는지 깨닫지 못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마르다는 말씀 듣는 것보다 예수님을 대접하며 섬기는 일을 먼저 선택했던 것입니다.

 

둘째로 마리아를 보십시다.

마리아는 그 성품이 차분하고 조용합니다. 물론 본문에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마리아가 부엌일을 전혀 하지 않는 여인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고 지금 내가 무엇을 먼저 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인지를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말씀 듣는 일을 먼저 선택한 것입니다. 또한 요11장에 오라버니 나사로가 죽었을 때도 그녀는

 

요11:20 “마르다는 예수 오신다는 말을 듣고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는 마리아가 나사로의 죽음을 애통해하면서도 집에서 은밀히 기도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고 있었다는 사실을 예고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부르신다고 할 때 그녀는

 

요11:28-32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

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이 말씀처럼 마리아가 급히 일어나 예수님께 나가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고 이후 아무 말 없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노라면 마리아의 신앙은 예수님이 오시면 죽은 나사로의 문제가 반드시 해결된다는 믿음의 확신이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즉 이러한 마리아의 모습은 그녀의 중심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확신하고 있는 자라난 신앙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후에 마리아는 예수님을 더욱 발견하고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님의 장사를 위해 향유를 부었던 것입니다.

 

3. 마르다의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

 

“몇 가지만 하든지 혹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그러면 처음으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이 대답을 통해서 예수님이 마르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내가 이 땅에 무엇 하러 왔는지 아는가? 내가 너에게 왜 왔는지 아는가? 내가 너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나의 가장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너는 아는가? 하는 것을 역으로 질문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이 질문에 바른 답변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 바른 답변을 위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은

 

①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본질입니다.

마16:16에 베드로가 예수님에 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존재와 우리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보여줍니다. 또한 빌2:6에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명확히 합니다. 그리고 히4:15에“죄는 없으시니”라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명과 본질적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님의 본질적인 모습을 깨닫고 먼저 말씀을 듣고 이후 물질로 대접하는 것이 마땅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마르다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②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사명입니다.

막10:45,마20:28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예수님의 사명은 자신의 목숨을 통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눅24:44-48에도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은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마르다를 찾아오신 것은 마르다의 영혼을 죄 가운데서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며 그 일을 너는 믿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라고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르다는 예수님이 전하시는 말씀을 듣고 그것을 먼저 발견하며 깨닫는 것이 먼저 해야 될 선택이었던 것입니다.

 

③공생에 사역 기간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입니다.

마3:2,마4:17에 공생에 사명을 시작하면서 전하신 예수님의 처음 메시지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였습니다. 그리고 눅4:18에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라는 메시지를 전파하면서 예수님은 죄인들을 죄 가운데서 해방시키고 자유를 주시기위해서 오셨다는 것을 계속 선포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마르다를 찾아오신 목적도 말씀을 통해 회개하고 자유를 누리며 천국을 누리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전하신 메시지를 깨달았다면 마르다는 무엇을 먼저 해야 될 것인지 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마르다는 예수님이 귀하게 여기는 자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의 선택은 바른 선택이 되지못했습니다.

 

4. 두 자매의 선택의 결과.

 

①마르다의 선택의 결과.

Ⓐ마음에 안정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대접할 준비에 정신이 없습니다. 또한 분주합니다. 그녀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잘 대접하겠다는 마음이 지배적이나 정작 예수님은 잊어버리고 식사준비에 온통 정신이 집중되어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합니다.

마리아의 행동이 얺잖습니다. 혹 마리아를 미워하고 욕하기까지 했을지 모릅니다. 즉 화평이 사라지고 동생을 미련하다판단하며 또는 시기하게 된 것입니다.

 

Ⓒ분열을 일으킵니다.

마리아의 선택을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데서 자신의 상황이나 환경만을 선택의 기준으로 삼고서 동생을 책망하고 나무라 달라고 예수님께 요청한 것입니다.

②마리아의 선택의 결과.

Ⓐ예수님을 기쁘게 했습니다.

“이 좋은 편을 택했다”하시며 (본문10:42)흡족해 하신 것이었습니다.

 

Ⓑ요11:25부활이요 생명 되신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통해 예수님의 사명과 성도의 본질을 발견케 된 것입니다.

 

Ⓒ요12:2-3,7 마리아는 예수님이 세상에 왜 오셨는지를 깨닫고 순전한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어 드렸습니다.

마리아는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녀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깨닫고 예수님의 사명을 위해 장사를 준비합니다. 즉 잠시 후에 다가올 예수님의 십자가를 준비한 유일한 여인으로서 그녀는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저의 이름도 기념하라고 주님이 명령하실 정도로 예수님이 세상에오신 목적과 사명을 예비한 유일한 여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26:13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그러므로 이러한 결과는 그녀가 말씀 듣는 것을 먼저 선택하는 삶을 살아가면서 나타난 결과입니다. 즉 복음이 증거 되는 곳에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라는 말씀 속에는 말씀을 먼저 듣고 선택한 삶의 결과가 어떠한 축복을 가져 올 것인지 예고하는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지난주 제 친구목사와 이야기하면서 사경회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교단을 세우신 이병규 목사님이 다른 친구 한분과 김현봉 목사님을 찾아가 말씀 배우던 일입니다. 말씀 배울 때 그것이 더욱 은혜가 되어 이후 몇 사람의 목회자가 더 모여 말씀을 들었고 그것이 더 발전하여 교회사경회로 발전했으며 후에는 교단 집회로 발전되는 역사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사경회에 참여했던 주의 종들은 다른 여러 교단을 세우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러므로 말씀 듣는 것을 먼저 선택한 결과는 후에 큰 역사를 이루어낸 것입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을 먼저 선택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는 우리의 미래를 자유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우리 영주교회는 이러한 선택의 결과를 누리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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